내인생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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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흐
고흐

고흐는 탈인상주의 화가로 분류되며 또한 인상파, 야수파, 초기 추상화 표현주의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며 20세기 예술의 여러 다른 분야에 영감을 주었다.

 

고흐 구필 화랑

1869년 7월 빈센트의 큰아버지 센트는 헤이그의 구필 화랑에 빈센트를 위한 자리를 구해준다. 빈센트는 화랑에서 미술 교육을 받은 뒤 1873년에는 런던 사우샘프 턴가에 있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옮긴다. 빈센트의 제수인 조 반 고흐 봉거는 이 순간이 빈센트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빈센트는 20살에 아버지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있을 정도로 일에서 성취감을 느꼈다. 빈센트는 하숙하던 집주인의 딸인 외제니 로이어에게 푹 빠졌지만 외제니 로이어는 이미 전에 하숙하던 사람과 비밀리에 약혼했던 탓에 빈센트의 고백을 거절했다. 이후 빈센트는 자신을 가두고 종교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이후 아버지와 큰아버지는 1875년에 파리로 전근을 주선했고, 빈센트는 거기에서 미술상들이 미술품을 지나치게 상품화한다며 분개하였다. 결국 1년 후에 해고되었다. 1876년 4월 빈센트는 영국으로 돌아가 램스게이트의 작은 기숙학교에서 무급 교사로 근무한다. 학교가 미들섹스의 아이즐워스로 이사했을 때 빈센트도 함께 갔다. 그러나 빈센트는 거기서도 잘 적응하지 못한다. 이후 런던의 선교단체에서 직업을 찾다가 감리회 소속 목사인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의 조수가 된다. 빈센트는 토머스 슬레이드 존스 목사와 함께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설교도 몇 차례 진행한다. 그러나 빈센트는 거기서도 적응하지 못하고 그 해 크리스마스에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서는 큰아버지 센트의 주선으로 도르드레흐트의 서점에 일자리를 얻었다. 그는 그 자리에 만족하지 못했고 낙서를 하거나 성경의 구절을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로 번역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그는 기독교에 몰두했고 채식을 하며 검소한 식사를 하는 등 점점 더 경건한 삶을 추구하여 마치 수도승과 같은 삶을 살았다.

선교사의 길

1877년 아버지를 따라 목회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빈센트의 열정에 부응하여 가족들은 암스테리담에서 존경받는 신학자인 이모부 요한네스 스트릭커에게 보낸다. 거기서 빈센트는 암스테리담 대학교의 신학 입학시험을 이모부의 지도 아래 준비했는데 시험에 실패하고 1878년 7월에 이모부의 집을 떠났다. 이후 그는 브뤼셀 근교 라켄에 있는 개신교 선교 학교에서 3개월 과정에 등한다. 비록 전도사 시험에는 합격하지 못했지만 벨기에의 탄광지대인 보리나주로 파견된다. 1879년 1월 빈센트는 벨기에 보리나주에 있는 가난한 광산촌 쁘띠와스메스에서 평신도 선교사직을 맡았다. 가난한 신도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빵집에서 구한 하숙집을 노숙자에게 내어주고 작은 오두막으로 이사를 가서 짚을 침대 삼아 잠을 잤다. 그러나 빈센트를 파견한 선교단체에서 보낸 시찰단은 빈센트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성직자의 존엄성을 훼손시킨다며 해고한다. 빈센트는 중재를 부탁하고자 브뤼셀까지 75km를 걸어 아는 목사를 찾아간다. 이후 목사의 중재로 보리나주에 있는 퀴엠으로 돌아와 무급으로 선교를 다시 시작한다. 그러나 빈센트는 에텐에 있는 집으로 돌아오라는 부모의 압력에 굴복하고 1880년 3월에 돌아온다. 가족은 빈센트의 정신상태를 걱정하여 아버지는 빈센트에게 헤일에 있는 정신병원에 들어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조언한다. 그러나 빈센트는 1880년 8월에 퀴엠으로 돌아가 광부와 함께 10월까지 머물렀다. 빈센트는 이제 성직보다도 미술에 더 깊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장면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미술을 시작하자는 남동생 테오의 제안에 따라 이를 그림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고희와 스케치

빈센트의 유화에 관심이 쏠린 탓에 그가 훌륭하고 아주 생산적인 소묘 화가라는 사실은 쉽게 잊히고는 했다. 소묘 작품은 미술가의 이력의 초기에서부터 존재했고, 그의 생애 마지막까지 제작되었다. 1888년 여름 몇 주 동안 고흐는 값비싼 유화 물감의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 전적으로 소묘만을 그렸다. 고흐는 훌륭한 화가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소묘를 완벽하게 다룰 줄 알아야만 한다고 확신했다. 1880년 선생이 없었기 때문에 교본을 통해서 체계적으로 형상 묘사의 법칙을 소묘를 통해서 습득하기 시작했다. 홀란드 시대에 그는 무엇보다 평범한 농부와 풍경, 그중에서도 그가 잠시 머물렀던 장소인 헤이그의 풍경을 표현했다. 그는 연필, 펜, 부분적으로는 백묵이나 흑연을 사용해서 대규모로 소묘 작품을 그렸다. 안톤 마우베가 1881년 말 고흐에게 수채화 기법을 알려준 이후로 그는 불투명한 그림물감으로 채색한 그림을 완성했다. 파리 시절에는 유화에 비해서 소묘가 뒷전으로 물러났다. 1887년 이후부터 빈센트는 다시 소묘를 점점 많이 그리게 되었다. 그중에서 파리의 풍경을 채색한 소묘화도 있다. 그는 아를에서 자란 갈대를 재료로 삼아서 직접 만든 펜을 도구로서 높이 평가했다. 동시에 그는 새로운 표현 기술을 개발했다. 연필로 미리 그린 밑그림 위에 갈대펜을 사용해서 아주 다양한 선, 점, 곡선, 나선으로 소재가 표현되었다. 이 시기에 그려진 그의 소묘 중에서 많은 작품이 유화와 연관되어 있다. 소묘는 유화를 준비하기 위해서 이용되었거나, 아니면 고흐가 나중에 그려진 그림의 소재를 소묘로 다시 완성하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소묘 작품은 삼자에게 그림에 대한 인상을 주거나 회화로 그려진 작품에서 그가 본 특정한 실수를 교정하도록 도움을 주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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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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