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의 스틸컷
article thumbnail
반응형

헬렌켈러
헬렌켈러

헬런 켈러는 미국의 작가, 교육자이자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그녀는 인문계 학사를 받은 최초의 시각 청각 청각장애인이다. 헬렌 켈러의 장애로 인해 가지고 있던 언어적 문제를 앤 설리번 선생과 자신의 노력으로 극복한 유년시절을 다룬 영화 [미라클 워커]로 인해 그녀의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헬렌 켈러 어린 시절

헬런 켈러는 1880년 6월 27일 미국 앨라배마터스컴비아에 있는 아이비 그린 농장의 저택에서 남부 동맹의 전직 사무관인 아서 H. 켈러와 로버트 E. 리 남부 동맹 총사령관의 사촌이자 전직 남부 동맹 장군이었던 찰스 W. 애덤스의 딸인 케이트 애덤스 켈러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가족은 스위스에서 왔다. 생후 19개월 후에 의사로부터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위와 뇌에서의 급성 출혈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이 병은 오래가지 않았지만 이로 인해 그녀는 평생 시각 장애와 청각 장애를 안고 살아가게 된다. 그때는 가정 요리사의 6살 난 딸이자 그녀의 수화를 이해하는 아이인 마르타 워싱턴과 대화가 가능했었다. 헬런 켈러는 7살 때부터 집안에서 60개가 넘는 수화를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했다. 소련의 시청각 장애 심리학자인 A. 메스체리코프에 의하면 마르타와의 교제와 그녀의 가르침은 헬렌이 나중에 발전하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였다고 한다. 1886년 헬런의 어머니 케이트 켈러는 찰스 딕슨의 <American Notes>라는 시청각 장애인인 로라 브릿맨에 대한 성공적인 교육에 관해 쓰인 글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곧 그녀는 공문을 헬런과 그의 아버지를 동행하게 하여 눈, 귀, 코, 목에 관련한 전문가인 J. 줄리언 치솜을 찾아 조언을 얻기 위해 볼티모어로 보냈다. 그는 이어서 청각 장애인들을 위한 일을 하고 있었던 알렌산더 그레이엄 벨과 그녀의 가족을 연결시켜 주었다. 벨은 보스턴 남쪽에 위치해 있고 브릿맨이 교육을 받은 학교인 <펄킨스 시각 장애 학교>에 연락해 보라고 조언하였다. 그 학교의 교장 선생인 마이클 아나가노스는 시력 감퇴가 있는 20살의 학교 졸업생 앤 설리번에게 헬런의 가정교사가 되는 것을 물어보았다. 이 일은 곧 49년간 이어지는 인연의 시작점이 되었다. 곧 그녀는 헬런의 가정교사가 되고 나중에는 그녀의 동반자로서 함께하게 된다. 앤 설리번은 1887년 3월에 헬런의 집에 도착하여 곧바로 헬런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헬런이 단어의 스펠링을 그녀의 손에 적어주는 식으로 그녀가 헬런에게 선물로 가져온 'd-o-l-l'의 스펠링으로 시작하였다. 그다음 달에는 헬런이 의사소통 방식에서 큰 발전을 보였는데 그녀가 헬런의 손에 차가운 물을 틀어주고 '물'이라는 단어를 손바닥에 쓰면서 연상시켜 주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헬런은 설리번과 세상의 다른 흔한 사물들을 익히는 데 시간을 쏟았다. 오른쪽 눈이 튀어나오기 전까지는 헬렌은 사물의 윤곽을 형상화시키며 배웠다. 그녀의 양쪽 눈은 의학적인 이유와 외관적인 이유 때문에 유리 복제품으로 대신 교체되었다.

 

정치적 활동

헬렌 켈러라고 하면 장애를 극복한 장애인 여성으로 생각하지만 역사 속의 헬렌은 사회운동을 실천한 사회주의 지식인이었다. 또 그녀는 시각장애인들을 돕는 데엔 중립이었다. 헬렌 켈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가이자 연설가로 점점 더 유명해졌다. 그녀는 불리한 신체조건 등 많은 장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지지 및 옹호로 많이 기억된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론자이자 평화주의자,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반대자였으며 또한 급진적인 사회주의자에 여성 피임 지원자였다. 1915년 헬렌 켈러와 조지 케슬러는 '헬렌 켈러 인터내셔널'이라는 단체를 설립했다. 이 단체는 비전과 건강, 영양 연구에 열심이었다. 1920년에는 그녀가 ACL 자유 인권 협회를 설립을 도왔다.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은 39여 개 국가들을 방문하였는데 그중에서도 일본의 몇 차례 방문으로 일본의 인기인이 되었다. 1937년 7월에 일본의 아키타현을 방문했을 때 그녀는 1935년에 죽은 유명한 개 충견 하치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녀는 일본인에게 아키타 견을 갖고 싶다고 말했으며 한 마리를 한 달도 안 돼서 받았고 이름은 카미케이지 고였다. 이 개가 개 홍역으로 죽었을 때 이 개의 형이었던 캔잔고가 일본 정부의 공식 선물로서 1938년 7월에 왔다. 헬렌 켈러는 이 두 마리의 개를 미국에 아키타 견을 소개하며 미국인들이 이 개들에 대해 신뢰할 수 있도록 했다. 1939년까지 품종 기준이 만들어졌고 도그쇼가 열렸지만 이런 행사는 제 2 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멈추게 되었다. 헬렌 켈러는 아키타 저널을 썼다. 만약 천사의 털이 있다면 그것은 카미카제의 털이다. 나는 다른 애완동물에게서는 영원히 이렇게 같은 느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아키타 견은 모든 것에 있어서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이 개는 온화하고 사교적이 고 믿음직하다. 헬렌 켈러는 그로버 클리블랜드부터 린든 조슨까지 모든 미국 대통령들을 만났고 또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찰리 채플린, 마크 트웨인 등 수많은 유명 인사들의 친구였다. 헬렌 켈러는 29세 때인 1909년 미국 사회당에 입당하였으며 공개서한 나는 어떻게 사회주의자가 되었나 발표와 방송 출연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했다. 또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 세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독일에 선전포고한다."라고 선언하자 "미국 백인들이 수많은 흑인을 학살하는 상황에서 우리의 지배자는 세계 평화와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는 비판으로 우드로 대통령의 도덕주의 가 얼마나 표리부동한 지를 신랄하게 비판할 정도로 헬렌 켈러는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확실하게 고발했으며 여성 참정권 운동, 사형 폐지 운동, 아동 노동과 인종차별 반대 운동을 실천했다.

그녀의 이러한 활발한 사회참여에 대해 보수주의 언론들은 "헬렌 켈러가 누군가에게 조종당한다." 라며 비난했는데 이에 대해 헬렌은 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공장, 빈민가에도 방문했다. 볼 수 없을지라도 냄새는 맡을 수 있었다. 라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사회참여를 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헬렌 켈러의 사회주의 운동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바로 자신이 당원으로 활동한 미국 사회당의 분열을 막지 못한 것이다. 당시 미국 사회당은 1913년 1월, 11만 당원 중 2만 명이 빌 헤이우드 집행위원에 대한 제명 조치에 반발, 탈당할 정도로 엄청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이에 대해 헬렌 켈러는 일치하여 민중의 편을 들어야 할 사회당이 두 파벌로 갈라져 서로 비열한 싸움을 벌인다고 비판했지만 결국 내분을 막지 못했다. 헬렌 켈러는 1909년부터 1921년까지 노동 계급의 지원자들에게 투서하였다. 그녀는 미국 사회당의 대통령 후보자인 유진 뎁스의 모든 대통령 선거 운동들을 지원하였다.

 

여담

1999년부터 시작된 미국의 25센트짜리 동전 50개 주 시리즈의 앨라배마판의 모델이다. 1937년 일제강점기 시절 한반도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경성부(현, 서울)에서 강의를 마치고 평양으로 향하는 기차가 개성에 잠시 정차했을 때 그 시간을 놓치지 않고 강연을 했다고 한다. 대구에도 방문했다. 그리고 이후 한국전쟁 때도 방한한 적이 있다. 헬렌 켈러가 어떻게 말을 배우게 되었는지 설리번 선생과 직접 시연하는 영상. 영상, 국어 자막 버전 동영상을 보면 말하는 사람의 목젖에 손을 대고 입술을 손가락으로 만져 진동과 입모양으로 내용을 전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교육법으로 처음 가르친 사람이 호렌스만 농아 학교의 교사 새라 풀러였고 이후 설리번 선생도 이 교육법을 익혀 헬렌에게 가르쳤다. 대화를 나눌 때는 상대방과 손을 직접 마주 대고 상대방의 수신호를 촉감으로 느끼는 방식을 이용했다. 위에서 설명한 방식으로 수년간 훈련을 계속해 자신의 입으로 소리를 낼 수 있게 되기는 했지만 평생 사람의 말을 들어본 적도 말을 할 때 입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본적도 거의 없기 때문에 명확하게 이해하기는 힘들다. 시각과 청각을 모두 잃은 만큼 촉각이 아주 섬세하게 발달해서 자신의 방에 누가 들어오면 그 진동만으로 상대방이 누군지 알아챌 수 있었다. 일본과도 상당히 인연이 있는데 1937년에 일본을 방문했고 아키타현에 가서 아키타견 하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아키타견 1마리를 얻어가지고 와서 길렀다. 그 아키타견의 이름이 카미카제였는데 털이 부들부들했는지 헬렌 켈러가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일본 방문 당시 헬렌은 지갑을 도둑맞았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일본인들이 '일본을 나쁘게 생각하지 말아 달라'라고 애걸하며 그녀 앞으로 돈과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중국도 방문하고 싶다고 본인이 몇 차례 언급한 적이 있으나 당시 중국의 상황이 군벌, 제2차 세계대전, 국공내전 등등으로 난장판이라 성사되지는 않았다. 레즈비언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다. 영어의 슬랭 가운데 헬렌 켈러와 앤 설리번 선생이 연인이었다는 속설을 반영한 'Pulling a Helen Keller'라는 표현도 있다. 헬렌 켈러의 성 Keller는 독일 쪽의 성으로 keller는 독일어로 "저장고"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영어 단어 cellar와 같다. 헬렌 켈러의 조상은 독일이 아니라 스위스에서 왔다고 한다. 스위스의 국어 중 하나가 독일어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다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녀는 스스로가 장애인임에도 장애인을 열등하게 표현하는 우생학을 지지하며 이에 대해 찬동한 적이 있다. 지금 시점에서는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지만 당시의 분위기와 지식인들의 풍조가 그러했으며 그녀가 살아있을 때는 아직 장애에 대한 개념이 명확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이러한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거기다 그녀와 인연이 있었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 역시 우생학에 찬동했기에 영향을 받았을 수 있다. 이와 같은 이들을 '시청각장애인'이라고 하는데 국내에도 1만여 명이 있다. 하지만 이들이 소통할 수 있는 건 수화와 점자밖에 없는데 인프라 및 지원이 매우 부족하여 사회생활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반응형
profile

내인생의 스틸컷

@블랙스완

"좋아요❤️" 또는 "구독👍🏻 답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