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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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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트마 간디는 인도의 법조인, 정치인이자 독립운동가이다. 대영제국의 식민 통치에 비폭력주의로 저항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칭호인 마하트마는 산스크리트어로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이다.

 

마하트마 간디 사상

간디에게 있어 진리는 단순히 사실적 진실 혹은 진술의 정확성이나 타당성을 뜻하는 것은 아니며 명제들로부터의 연역으로 도달한 논리적 진실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그에게 진리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진리를 넘어서서 홀로 존재하며 만물을 구성하는 물질을 구성하며 자신의 힘으로 유지되며 다른 어떤 것의 지지도 받지 않고 오히려 존재하는 모든 것을 뒷받침하는 최고의 원리이다. 이러한 진리는 상대적인 진리만이 아니라 절대적인 진리, 곧 영원한 원리로써의 신을 뜻한다. 진리를 뜻하는 사땨는 존재를 뜻하는 사뜨에서 파생된다. 그것은 진리만이 영원하며 다른 모든 것은 순간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 혹은 존재는 신의 가장 중요한 이름이다. 진리는 온 누리를 담당하며 진리가 실현될 때 실현되는 것은 신과 그 권능이며 이것은 사땨그라하를 실천하는 사람의 영혼의 힘이기도 하다. 영혼의 힘은 진리의 권능에서 나온다. 간디가 말하는 이러한 진리는 말의 진실뿐만 아니라 행동의 진실이기도 하다. 따라서 진리에는 비폭력, 독신생활 등과 같은 여러 가지 행동의 원리들도 포함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간디는 신을 인간의 모습을 한 인격신으로 보질 않고 진리가 곧 신이라고 한다. 이유는 그가 추구하는 절대적인 신을 아직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는 신을 진리로 대할 때만 신을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의 목표는 그가 신과 동일시하는 진리의 발견에 있다. 그리하여 간디의 철학에서 신이 진리라기보다는 진리가 신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간디가 신을 추구한다고 할 때는 언제나 그가 말하는 진리라는 영원한 원리를 추구함을 뜻한다.

평가

그의 종교 사상의 근본은 아함사 즉 무상해였고 인류애에 의한 폭력 부정만이 최후의 승리임을 확신하고 이를 그대로 정치 활동에 실천하였다. 육체적 욕망을 극도로 제한하고 때로는 금식에 의해 속죄하였다. 또한 인도 인습인 사회적 계급 제도의 타파에 노력하였으며 불가촉천민의 해방을 실천하였다. 진실을 사랑하고 기만을 증오하였으며 사회악에의 철저한 반항이 정치 활동의 강한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일생 동안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폭력을 거부했는데 그의 비폭력주의는 나라 안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큰 영향을 주었다. 1918년 인도 국민회의의 지도자 역할을 맡은 것을 전후로 자유를 얻기 위한 투쟁의 선봉에 서면서 간디는 인도의 상징 중 하나가 되었다고 평가된다. 또 그 때부터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의 '마하트마'로 불리게 되었다. 간디 자신은 이런 명예를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마하트마 간디로 불린다. 1999년 4월 18일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지난 1천 년간의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운동을 선정하였다. 간디는 종교적으로 너그러워서 힌두교 이외의 종교인들과도 교류하였다. 그의 친구 중에는 감리교 선교사인스텐리 존스가 있었다. 스탠리 존스가 간디에게 기독교가 민중들에게 다가서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지혜를 구하자 간디는 "예수 그리스도 같은 삶"을 제안하였다.

 

비판

간디는 거룩하고 활발한 사회운동을 했지만 노동자들에게 간디는 자본가들을 위해 봉사하는 지식인에 불과한 측면도 있다. 그는 1917년 파업권이 없는 노동조합결성 지원을 자본가들에게 제의해서 구자라트 주의 노동운동을 침체시켰는데 이는 활발한 노동운동으로 노동인권을 쟁취해 간 봄베이의 노동자들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또한 1935년 가족 중 한 명이 실직시 다른 가족의 임금을 인상하는 제도인 가족임금제도를 받아들여 힘없는 여성과 노인노동자들이 해고당하게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전쟁에 협력하면 인도를 독립시켜 주겠다는 영국의 회유에 현혹되어 인도의 전쟁가담에 관여했는데 이는 그의 비폭력주의에 어긋나는 점이 있다. 참고로 비폭력주의는 대국인 인도 실정에는 부합할 수 있지만 약소국의 독립운동으로는 적합하지 않을 수 있어 실제로 많은 식민지 나라들이 이를 채택하지 않았다. 간디는 불가촉천민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 분노했지만 결코 카스트 제도를 부정하지 않았고 오히려 카스트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힌두교를 옹호하는데 일생을 보냈다. 2018년에는 간디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면모에 반발하여 아프리카 가나 수도에 있는 가나 대학교에서 간디의 동상을 철거한다. 그런데 2019년 연세대학교에서는 인도로부터 간디 동상을 선물 받아 인천 송도의 연세대 국제캠퍼스에 세운다. 또한 1990년대 이후 간디의 부적절한 사생활이 알려지면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간디 스스로도 성욕을 자제하는 것이 '칼날 위를 걷는 것과 같다'라고 어려움을 고백하기도 했지만 환갑이 넘어도 끊이지 않는 몽정을 속죄하기 위해 발가벗은 수 명의 여성들과 함께 자기도 했다. 새색시에게 몸으로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해 줄 것 부탁했는데 알몸으로 간디의 몸을 데워 주었던 대부분의 여성들은 다른 여자들에 대한 질투심이 있었지만 간디로부터 받는 사랑을 잃어버릴까 봐 두려워서 거절하지 못했다. 어린 소녀들과 동침한 일에 대해 평소 고백을 하기도 했었지만 실상은 서양의 회춘법인 스네미티즘을 신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증손녀뻘 되는 친족인 마누 간디와도 동침하였는데 작가 월리엄 샤일러는 이를 두고 '여성의 질투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바람둥이'라고 비판하였다. 1908년에는 동성 연인 칼렌바흐와 지내기 위해 부인 곁을 떠나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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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스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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