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인생의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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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우 감독
출처 idomin.com 뉴스

신선우(1956년 2월 10일 ~ )는 대한민국의 은퇴한 농구 선수이자 현재 KBL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총감독이다.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으며 광희초등학교, 용산중학교,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에 진학했다. 이후 현대전자 실업팀에 있다가 1984년 은퇴한다.

신선우 선수시절

용산고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센터였고 박수교와 함께 연세대를 이끈 선수였다. 센터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키인 188cm이지만 당시로서는 그래도 제법 큰 키였고 무엇보다 농구 센스가 좋아서 작은 키를 커버했다. 특히 골밑에서 외곽으로 적절할 때 빼주는 패스가 일품이었다고 한다. 신선우가 특별했던 점은 중앙대의 한기범과 김유택이 등장하기 이전 우리나라에서 센터는 골밑에서 궂은일을 하고 스크린이나 서주는 장승같은 역할이 고작이었는데 그런 기존의 센터들과는 격이 다른 농구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포인트 가드보다 공을 더 많이 소유했고 하이 포스트로부터 패싱력으로 게임을 풀어나갔던 올라운더였고 자신이 맡은 상대팀 센터를 꽁꽁 묶어버리는 수비력은 물론 패싱 레인까지 차단하며 많은 스틸까지 유도해 내는 빅맨이었다. 신선우는 단 10점만 득점하고도 경기를 장악했다는 소리를 듣던 특별한 센터였다. 그러나 선수로서는 나름대로는 성공적이었지만 많은 경기에 뛰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잦은 부상 때문이었다. 이미 대학교 시절에 허리 디스크로 고생했는데 여기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무릎 관절염까지 앓으면서 선수로서의 기능이 치명적으로 떨어졌다. 결국 1979년에 가면 일시적으로 은퇴를 선언하고 재활에만 매달리는 상황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비록 1977년에 현대의 창단 멤버로 합류해서 잠시 뛰기는 했지만 이 무릎 부상으로 인해 뛰어난 활동량은 절반으로 감퇴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부상에 대한 재활 끝에 1982년에 극적으로 재기에 성공하면서 코트에 복귀할 수 있었고 1982 뉴델리 아시안 게임 대표로 합류해서 중국을 누르고 사상 첫 아시안 게임 남자 농구 금메달을 차지하는데 1등 공신으로 활약했다. 신선우는 장신의 중공 센터진을 거의 홀로 초토화시켰고 영리한 플레이로 종횡무진 활약하였다. 또한 팀에 신동찬, 박수교라는 리딩 가드가 둘이나 있었음에도 상대팀 진영까지 볼을 운반하는 것도 신선우였고 신선우가 박수교에게 공을 넘겨주면 신선우가 다시 하이포스트에서 공을 건네받고 박수교, 이충희, 신동찬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지점에서 오픈 찬스를 기다리는 식이었다. 또한 중국의 무태추가 나오지 않았던 시기여서 이길 수 있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 자신을 하얗게 불태운 결과였고 또다시 무릎 부상이 도지면서 결국 신선우는 1984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활약해서 83-84 초대 농구대잔치 우승을 현대에게 안겨주고 은퇴는 했다. 참고로 연세대 출신 중 삼성의 선수이자 기아의 코치였던 동기인 박인규도 있었다.

 

신선우 지도사시절

현대 감독 선임 전까지

은퇴 후 1986년 창단한 현대중공업 여자 농구팀의 코치로 선임되면서 이병국 초대 감독을 보좌해 지도자의 첫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현대중공업 농구팀이 현대증권으로 이관되는 과정에서 신선우는 농구 지도자의 세계를 떠나 현대증권의 평사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여기서 제법 능력을 발휘하며 1993년에는 부장자리까지 승진하면서 승승장구했고 법인 영업 부장으로 활약하며 그대로 증권맨으로 남을 수도 있었지만 1994년 동기인 박수교가 사퇴한 현대전자 남자 농구팀의 감독으로 임명되면서 증권맨 생활을 접고 농구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대전 현대 다이냇/걸리버스

1994년 부임 당시 현대전자는 농구대잔치의 강호로서의 명성은 완전히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기아자동차는 건재했고 라이벌인 삼성전자가 스카우트 싸움에서 그래도 간간히 대어를 건진 것과 달리 현대는 전혀 스카우트 싸움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 이 상황에서 신선우는 일단 이상민과 조성원을 영입했지만 이들을 모두 군대로 보내면서 후일을 기약했고 프로 출범이 임박한 상황에서 이들을 프로 출범에 맞춰서 쓰려는 계획이었는데 이 판단은 신의 한 수였다. 프로 출범 원년인 1997 시즌에는 8개 팀 중 7위로 부진했지만 97-98 시즌 이상민과 조성원이 제대하고 추승균이 입단하면서 현대의 전력은 단숨에 강해졌다. 그리고 여기에 신선우의 절묘한 묘수로 영입한 외국인 선수가 바로 조니 맥도웰이었다. 맥도웰의 힘과 탄탄한 기본기를 주목한 신선우는 2라운드에서 팀의 파워포워드 자리를 맥도웰에게 맡겼고 거기에 이-조-추 라인이 추가된 힘이 보강되면서 정규시즌 3연패 및 챔프전 2연패를 차지하며 일약 왕조의 반열에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99-00 챔피언 결정전에서 로렌조 홀을 데려오기 위해 라이벌인 최인선 감독이 있는 SK 나이츠로 트레이드 시킨 재키 존스에게 밀리고 여기에 SK의 포워드 로데릭 하니발에게 이상민이 키에서 밀려서 눌리는 것을 보고 당했다. 결과는 기아 왕조를 끌어내렸던 최인선 감독의 SK 나이츠에 3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을 하고도 99-00 KBL 파이널에서 높이열세로 인해 대실패를 당하면서 결국 SK에게 최종우승을 내줘 3연패 달성이 좌절됐다. 00-01 시즌에는 토털 바스켓 볼로 전 선수를 장신 포워드로 꾸려서 승부를 보기 위해 조성원을 양희승과 바꾸면서 선수들의 장신화를 꾀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팀은 20승 25패로 정규리그 6위를 기록했어도 다행히 플레이오프 진출은 성공했으나 6강에서 청주 SK에게 2연패로 완패당했고 현대 다이넷-걸리버스는 같은 라이벌이었던 기아 엔터프라이즈와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1994 ~ 2005 전주 KCC 이지스

KCC 이지스로 인수되었던 첫 번째 시즌인 01-02 시즌에는 12연승을 달리면서 어느 정도 안정세를 찾았다. 하지만 01-02 시즌 PO에서 외국인 선수 1명으로 맞서던 SK 나이츠에게 4강 PO에서 패하면서 챔프전 진출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토털 바스켓볼은 점차 센터의 높이에서 밀리면서 그 위력이 떨어졌다. 애당초 2001-02 시즌의 성공도 현대 시절에도 뛴 적이 있었던 재키 존스의 위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여담으로 1999-2000 시즌부터 3 시즌 연속 포스트시즌에서 최인선 감독에게 또다시 무릎을 꿇는 굴욕 사는 또 이어가게 되면서 토털 바스켓볼을 포기하고 팀 재건에 나서야 했다. 02-03 시즌에는 양희승 대신 01-02 창단 첫 통합우승과 2002 부산 아시안게임 농구 금메달 신화를 창조했던 김진 감독이 이끈 대구 동양 오리온스의 전력약화를 노렸는지 샐러리 캡으로 인해 잡기 어려웠던 전희철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면서 높이를 더 높였다. 하지만 높이에서 전희철의 공백을 절감했으나 이 트레이드는 KCC에는 최악의 한 수로 남게 되었고 높이를 높였지만 외국인 문제와 조화는커녕 가득했었던 악재 때문에 가장 최저 성적이었던 20승 34패로 정규리그 9위라는 굴욕을 당했다. 자존심이 상했던 신선우 감독은 03-04 시즌을 앞두고 외국인선수 트라이아웃 1순위로 찰스 민렌드를 선택했다. 여기에 시즌 도중인 12월 3일 전희철을 SK 나이츠에 내주고 조성원이 KCC에 복귀함과 동시에 이조추 트리오가 다시 뭉쳤면서 민렌드도 준비하게 시작했다. 신선우 감독도 그 사실에 조성원을 생각하면 미안하다고 했고 다시 과거의 이조추 시절 트리오의 명예회복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결승에 진출한 KCC는 통합우승을 노리는 정규리그 1위 팀 원주 TG삼보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기존의 이조추 트리오와 찰스 민렌드의 시너지를 노렸던 덕분에 KCC는 7차전 접전 끝에 누르고 우승에 성공했다. 2004-05 시즌에도 한번 더 대권에 도전했지만 여전한 우승후보이자 전년도 통합우승에 실패한 원주 TG삼보가 KCC의 전략을 막아내 복수에 성공하면서 첫 KBL 통합우승과 함께 V2를 달성했다. 그리고 신선우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서라는 이유로 구단에서 재계약을 검토했으나 이를 거절했고 당시 최고 대우였던 역대 최고 연봉인 3억 원으로 창원 LG 세이커스로 이적하면서 10년 넘게 정들었던 현대-KCC를 떠났다. 현대-KCC에서 정규리그 우승 3회와 플레이오프 우승 3회를 포함해서 통합우승 2회를 했으나 동세대 라이벌이었던 최인선 기아-SK 감독과 전창진 TG 삼보 감독에게 한풀이의 대상이 된 건 옥에 티였다.

2005 ~ 2008 창원 LG 세이커스

05-06 시즌 이적 이후 3년간 연봉 3억이라는 당시 최고 대우와 함께 LG스포츠의 형제 야구단인 LG 트윈스에서 시구를 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되었다. 창원 LG 감독에 새로 부임한 신선우는 현대-KCC의 프랜차이즈였던 유도훈 수석코치, 이지승 코치와 함께 동행하면서 새로운 도전을 하게 된다. 그러나 황성인이 문제가 있었는데 가드 라인 보강을 검토하면서 신기성을 영입하려고 했으나 구단과의 상의 끝에 높이 보강 차원에서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멤버로 20년 만에 한국농구의 아시안게임 우승을 이끌기도 했던 당시 최고의 올어라운드 포워드인 현주엽을 FA로 영입을 하면서 새 출발을 시도했다. 역시 평가는 우승후보였는데 전임이었던 박종천 감독 시절 가드에 문제가 있는 황성인 선수가 있지만 기존의 조우현 선수가 있는 상황에서 아주 높은 높이는 아니지만 포인트포워드라는 별명을 얻은 현주엽 선수를 신기성 선수를 대신해서 영입한 것도 바로 신산의 계산 중 하나다. 미디어는 신선우와 현주엽의 만남만으로 우승후보로 띄웠다. 외국인도 드미트리우스 알렉산더라는 최고의 올어라운드 빅맨을 통해 높이를 높이는 데 성공하게 된다. 남은 관건은 바로 신 감독이 현대-KCC 시절부터 강조한 "조화"였다. 그러나 새 팀에서의 첫 번째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알렉산더의 반대의 헥터 로메로와 로먼 롤란 사이의 외국인 문제가 있었고 현주엽 또한 토털 농구 대신 추일승 시절과 그 이전의 약팀 시절 에이스 모드만 고집하면서 공수조화를 찾지 못했다. 그로 인해 결과는 정규리그 8위라는 부진과 함께 6강 PO에서 탈락하면서 최고 명장으로서의 체면을 구기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의 친정으로 허재가 부임한 전주 KCC 이지스와 김동광 감독의 안양 KT&G 카이츠 그리고 김진 감독의 대구 오리온스와 공방률 경쟁까지 갔으나 홈 최종전인 KCC전에 패하면서 LG는 자신의 후배였던 전임 감독인 박종천 시절을 포함해서 2년 연속 플레이오프 탈락의 비극을 당하게 된다. 추가로 전임 감독이었던 김태환 감독의 서울 SK 나이츠도 탈락의 고배를 마셨다. 사실 05-06 시즌은 각 팀 간의 전력차이가 크지 않았는데 당시 4강 후보였던 LG와 SK는 그야말로 농구팬들에게는 충격과 같았다. 이로 인해 신산이라 부르는 신선우는 KBL 최고 명장의 자존심에 다시 한번 상처를 입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현주엽은 신선우의 계산 대신 나 홀로 매직 존슨 모드로 가끔씩은 팀워크와 반대의 농구를 하면서 비판을 받게 된다. KTF 매직윙스 시절만 보면 추일승 감독의 경우 자신을 맞추도록 하는 게 아니라 살리도록 하는데 정작 신선우는 그것을 하지 못했다. 절치부심한 신선우는 LG 세이커스의 창단 10주년이었던 2006-2007 시즌을 앞두고 LG의 창단 첫 KBL 통합우승을 위해 LG라는 이름을 제외하고 팀 자체를 대폭 개편하게 된다. 시즌 개막 전에 전자랜드와 시간차 트레이드를 단행하면서 대폭적으로 팀 개편을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LG는 당시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시절 막내였던 방성윤을 보내는 3대 3 트레이드의 핵심으로 KTF 소속이었던 99-00 SK 나이츠의 창단 첫 플레이오프 우승과 2002 부산아시안게임 금메달 멤버 중 하나인 슈터 조상현을 FA가 되자 즉시 영입했다. 추가로 그를 영입하는 과정에서 알짜 선수들을 보상으로 내주지 않기 위해 벌인 일종의 계산 같은 거래였다. 먼저 99-00 SK 나이츠 시절 자신에게 아픔을 주었던 2002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시절 대표팀 슈터였던 조상현을 영입하기 전인 4월 30일, LG는 현금 3억 원을 받으면서 조우현, 정종선, 정선규를 전자랜드로 보낸 후 6월 1일에 마침내 FA 최대어 슈터였던 조상현을 영입했다. 문제는 LG가 이런 식으로 사전에 로스터를 대거 정리하는 바람에 KTF가 지명할만한 선수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어쩔 수 없이 추일승의 KTF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보상선수로 전년도 평균득점 0.9의 임영훈을 지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6월 13일에는 다시 전자랜드와 트레이드를 하여 황성인과 3억 원을 주고 박지현, 박규현, 박훈근, 임효성을 데려오게 된다. 결과적으로 시간차를 두고 전자랜드와 4:4 트레이드를 한 것이다. 이 트레이드는 신선우만이 할 수 있는 역시 신산다운 극한을 보여준 트레이드로 평가된다. 어쨌든 이렇게 트레이드와 FA 영입으로 전력을 보강하고 외국인 선수도 03-04 시즌과 04-05 시즌 KCC 이지스에서 함께했던 영리한 스코어러 출신인 찰스 민렌드를 다시 데려오고 퍼비스 스코라는 괜찮은 수비형 센터를 데려온 뒤 2년간 성적부진과 함께 KBL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순위로 경희대 출신 땅꼬마 포인트 가드이자 이해 LG의 창단 첫 신인왕이었던 이현민을 지명하면서 전년도와 다르게 전력을 대폭으로 보강하는 데 성공하게 된다. 06-07 시즌에는 현주엽-조상현-이현민 트리오와 찰스 민렌드의 득점력과 함께 마침내 성적을 내게 된다. 그것도 2위 경쟁을 했던 KTF 매직윙스와의 4강 플레이오프 홈 코트 어드벤티치를 놓고 시즌 막판까지 경쟁하다 최후의 승자가 되었다. 하지만 4강 PO 3차전에서 상대의 거친 수비에 말린 파스코가 심판을 폭행하는 초유의 사태에 휘말리면서 퇴출되었고 결국 KTF에 골밑 수비를 막아내지 못하면서 자동으로 진출했던 4강 PO에서 그대로 탈락하면서 기대 이하의 1승 3패라는 충격으로 이어지게 되면서 KBL 파이널 진출에 실패하게 되었고 창단 10주년에 챔피언을 노렸던 창원 LG의 꿈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07-08 시즌에는 29승 25패를 기록하며 간신히 6위로 PO 진출에는 성공했으나 6강 플레이오프에서 전자 라이벌인 삼성에게 0:2로 패하면서 탈락했다. 그리고 LG는 우승이라는 목표가 어긋나자 KBL 명장인 신산 신선우 감독은 결국 LG와 이별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사실 신선우 감독은 12년간 감독생활로 인해 지쳐있었고 구단과의 면담 끝에 재충전을 스스로 원했는데 절대로 경질이나 사퇴가 아닌 계약만료에 따른 퇴임이었다.

2009 ~ 2011 서울 SK 나이츠

잠시 야인으로 지내며 KBL 위원장으로도 활동하던 신선우는 몰락을 거듭하던 KBL의 레알 마드리드라 불리는 SK 나이츠의 부활을 맡게 된다. 2009-10 시즌 중 연말에 자진 사퇴를 했던 KBL 대표명장인 김진 감독의 후임으로 서울 SK 나이츠 6대 감독으로 예상보다 KBL 감독으로 일찍 부임을 했다. 하지만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다. 현대-KCC 시절 우승트리오였던 이상민과 조성원 그리고 추승균만 아니라 이적생이었던 양희승과 전희철과의 마찰이 있었고 LG 시절만 해도 현주엽과 조상현 및 박지현과 이현민을 장악하는 데 실패하면서 과거 카리스마형 농구로 인해 전임 김진 감독 시절 자율 속 체계에도 불구하고 부상과 슬럼프가 깊은 SK를 구해낼지는 반신반의하기도 했다. LG 시절에 함께했던 이지승 수석코치와 함께 명예회복을 위해 지휘봉을 잡게 되었다. 2009년 12월 26일, 신산은 LG 세이커스 감독 시절 이후 무려 1년 8개월 만에 복귀전을 치렀다. 그러나 09-10 시즌 중도에 선임이 된 나머지 전임 감독 시절부터 이어진 연패 기록을 그대로 이어가 구단 역대 최다인 12연패를 당했다. 외국인 또한 사마키 워크와 조셉 데버트를 모두 교체하면서 조 크래븐호프트와 크리스토퍼 가넷으로 변화를 주었으나 기량미달의 외국인이었고 이로 인해 방성윤과 김민수에게 몸싸움과 스크린 등 궂은일을 타임아웃 때 강조하면서 탈출구를 찾으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전임 감독 체제에 적응된 베테랑들인 문경은과 주희정도 그 이전 시절에 비해 달라진 팀 분위기 적응에 끝내 실패를 하면서 최악의 시즌으로 마무리하게 된다. 결과론으로 연말에 충격적인 사임을 선택했던 김진 감독의 사퇴는 큰 의미가 없게 되었다. 이미 SK 구단은 SK 프런트에서 이미 영구결번과 함께 차기 감독으로 세우기 위해 준비 중이었던 문경은은 2009-2010 시즌 이후 선수로서 은퇴를 한 이후 SK D 리그 코치로 준비하면서 신선우 감독은 그나마 있었던 최고 슈터 하나마저 잃게 된다. 이 여부와는 별개로 신선우 감독은 마치 조성원처럼 유종의 미를 원했던 문경은을 배려했다. 문경은은 이미 은퇴 이후 인터뷰에서 밝혔는데 출전시간은 오히려 김진 감독 시절보다 더 많은 기용을 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취약점인 슈팅 가드에서 마치 조성원으로 생각했던 모비스 피버스에서 통합우승을 했던 스윙맨인 브라이언 킴이라 불렸던 테크니션 가드인 김효범을 SK 레전드였던 문경은의 은퇴와 SK 간판이었던 방성윤의 부상문제로 인해 FA로 영입하게 되었다. 10-11 시즌을 앞두고 주희정, 김효범, 방성윤, 김민수 등 국가대표팀을 구성할 만한 호화멤버들이 여전하면서 시즌 전 전망에선 늘 우승후보로 꼽힌다. 외국인도 테런스 레더와 마퀸 챈들러라는 검증을 찾으면서 이 정도면 재건이 아닌 우승도전이었다. 초반엔 반짝 상승세를 타는 것도 최근 2~3년간의 패턴이 반복되었지만 시즌 중반만 되면 뒷걸음질을 쳤고 부상 후유증에 걸린 방성윤은 시즌 중반 코트에 복귀했지만 특급 선수에서 평범한 선수로 후퇴했다. 실제로 3 라운드에서 4 라운드까지 5할 승률에 6강 플레이오프 권을 유지했으나 끝내 누적된 부상과 체력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게 되며 재임기간 동안 2년 연속으로 21승 이상을 거두지 못하더니 2년 연속 7위의 성적과 함께 굴욕을 피하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SK 나이츠는 KBL 통합우승 출신 2명의 감독을 연속으로 선임하고도 시련사만 반복하는 암흑기로 또 이어지게 되었고 결국 이렇다 할 전력 향상을 보여주지 못한 채 20승 34패 정규리그 7위를 기록하며 차기 시즌 외국인 영입을 위해 출장 중 구단으로부터 경질 포함 1년 총감독직을 주면서 불의의 퇴진을 당했다. 사실 신선우 감독은 10-11 시즌 정규리그 종료 이후 차기 시즌 외국인 영입을 위해 해외출장을 갔는데 돌아온 것은 뒤통수였다. 마치 김성근을 뒤통수친 SK스포츠단의 흑역사와 SK 나이츠 프런트의 계산에 자신이 부메랑을 당한 격이었다. 09-10 시즌 16승과 10-11 시즌 20승 그리고 문경은이 감독대행이 된 11-12 시즌 19승과 9위에도 불구하고 SK 프런트의 문경은 감독 만들기에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대학과 실업 선수시절과 프로 감독 시절 평생의 라이벌이었지만 알고 보면 대표팀의 동료이자 동갑이었던 안준호 감독도 삼성에서 퇴진한 뒤 자신으로 인해 신산이 물러나게 되었던 점에 씁쓸함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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